03. 타인이 나에게 연결되기까지
최종 수정일: 7월 26일
박지경
며칠 전 엄마의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에 모시고 갔다. 진료과를 방문하기 전 주사실로 향했다. 간호사가 말했다. “대기 시간이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접수 먼저 하시고 CT실에 늦어진다고 말씀드리고 오세요.” 서둘러 CT실을 다녀왔다.
엄마는 별말이 없었다. 나도 말없이 서 있었다. 빈자리가 하나 나자 엄마를 먼저 앉혀 드렸다. 잠시 뒤 멀리 자리가 비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앉았다. 우리 사이의 거리만큼 자리도 멀어져 있었다. 시선은 무료함을 달래려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 한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나한테 전화를 바꿔줘야지. 저기라고만 하면 어떡해. 지금 몇 바퀴째야.” 휠체어에 앉은 할아버지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아, 네! 간호사님. 000 할아버지 보호자인데요. 네, 네.” 손녀의 목소리는 다시 차분해졌다. 할아버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 위로 엄마와 내가 겹쳐졌다.
결혼 전에는 사이좋은 모녀였다. 고생하는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는 딸이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
큰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던 무렵,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물었다. “엄마, 엄마는 나 어릴 때 나를 사랑했어?” 엄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가 우쨌는데... 엄마도 그땐 시집살이하면서 직장 다니고, 느그 키우고...”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소리쳤다. “변명 그만해. 듣기 싫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단 하나였다. “그때 엄마가 사랑을 많이 못 줬나. 미안하네, 딸아.”
그날 이후 엄마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묵묵히 듣기만 하셨다. 병원에서 본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그날 병원에서 나는 낯선 사람을 본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삶 속에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다정한 아들 속에도, 할머니의 가방을 꼭 쥐고 있는 할아버지 속에도,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딸의 모습 속에도, 할아버지에게 짜증을 내던 손녀의 모습 속에도 모두 내가 있었다.
타인의 삶이 내 마음을 흔드는 이유도 그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의 삶을 보면서, 결국 모퉁이 끝에 숨어 있는 내 삶을 다시 읽는다.
사람은 서로의 사정을 전부 알아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낯선 사람에게서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서로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이 열리기도 한다.
‘우리’는 같은 삶을 살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나를 발견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_edited_edited_edited.png)
_edited_edited_edited.png)
댓글